노동계급 중심성 개념이 어디에 처음 나오는가? 노동계급 중심성을 처음으로 주장한 것이 마르크스였을까? 아니다. 엥겔스였다. 1844년 파리에서 쓴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라는 책에서다. 이 책은 노동계급이 했던 역사적 구실은 물론 미래 사회에서 수행할 구실을 소개하는 탁월한 입문서다.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점은 이 책에 나온 것과 같은 사상들이 도서관에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위대한 사상들이 도서관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은 꿈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다.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썼듯이, 공산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의 역사적・국제적 경험을 일반화한다. 즉, 노동계급의 경험으로부터 사상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한 예를 들어보겠다. 1848년에 나온 《공산당 선언》은 사회주의 혁명 후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 아주 모호하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어떤 모습일지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 후 마르크스는 1871년에 다른 소책자를 쓰는데, 거기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되면 관료제와 상비군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모든 공직자가 선출되고 소환 가능하며 노동자 평균 임금을 받을 것이라 썼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마르크스가 영국 박물관에서 정말 열심히 연구했구나. 1848년에는 생각지 못했던 것을 1871년에 생각해 내다니!” 전혀 그렇지 않다. 1871년에 마르크스가 제시한 관점은 그해 일어난 파리 코뮌에 영향받아 형성된 것이었고 그것은 현실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파리의 노동자들은 그들의 코뮌을 만들어 냈고 거기에는 관료제도, 상비군도 없었다.
엥겔스가 노동계급 중심성을 발견한 이야기로 돌아가면, 엥겔스는 마르크스보다 더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 이점은 마르크스가 이주해오기 전부터 영국에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 영국은 세계 최초의 노동계급 대중 운동인 차티스트 운동이 출현한 곳이다. 당연히 여기 영국의 학교에서는 이런 사실을 가르치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영국이 혁명과 거리가 먼 나라라고 배운다. 차르를 죽인 것은 러시아인들이다. 왕을 단두대에 세운 것도 프랑스인들이다. [교수형 당한 영국 국왕] 찰스 1세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라! 혁명이란 외국에서나 일어나는 현상이어야 하므로 차티스트 운동은 언급되지 않는다.
하지만 1842년 역사상 처음으로 총파업이 일어난 곳은 바로 이곳 영국이다. 엥겔스는 이를 직접 목격할 수 있었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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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책[《영국 노동계급의 상태》]의 중요한 점은 단순히 노동계급의 삶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 묘사도 매우 흥미롭기는 하다. 엥겔스는 노동계급의 삶을 그릴 때 찰스 디킨스처럼 “오, 불쌍한 녀석들! 노동자들이 고통받고 있어요. 조금만 더 도와주실 수 없을까요, 높으신 양반들?” 하는 식의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엥겔스의 태도는 정반대였다. 그의 묘사에는 엄청난 낙관주의가 배어 있다. 노동자들은 역사의 희생자가 아닌 역사의 주체로, 역사를 만드는 사람들로 나온다.
엥겔스는 공산주의를 어떻게 정의했을까? 그는 놀라울 정도로 압축적이고 (마르크스보다 훨씬) 간결한 문체로 이렇게 썼다.
공산주의는: (1) 부르주아지에 맞서 프롤레타리아의 이해관계를 관철하는 것. (이것은 명백히 계급적인 용어이다 — 클리프) (2) 이를 위해 사유재산을 폐지하고 공동체의 재산으로 대체하는 것. (3) 이 목적을 이루는 수단은 오로지 강제에 의한 민주주의 혁명뿐이라고 보는 것.
여기에는 공산주의의 정의에 필요한 모든 요소가 다 담겨 있다. 공산주의는 혁명적인 강제력으로 쟁취하는 것이고, 민주적인 것이다. 어떤 50명이 유혈낭자한 쿠데타를 일으켜 다른 50명에게서 권력을 빼앗는 일 따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정의는 매우 중요하다. 또, 엥겔스는 혁명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할 때 두 가지 이유를 든다. “지배계급을 전복할 다른 방도가 없을 뿐 아니라, 오직 혁명을 통해서만 피지배 계급이 그 시대의 오물을 씻어 내고 새로운 사회에 걸맞는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계급 사회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온갖 쓰레기 같은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 있다. 사회의 지배적인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고 지배계급의 사상은 모든 것을 지배한다.
명백하고 노골적인 사상만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인종차별주의가 나쁜 사상이고 반동적임을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지배계급의 사상은 초보적인 생각에도 영향을 미친다. 내 딸이 일고여덟 살일 때 일이 기억난다. 그 아이가 나랑 말싸움을 했다.(무엇 때문인지는 기억이 안 난다.) 그러고 나서 그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아빠 말이 맞겠죠.” “왜 내 말이 맞는데?” “나보다 나이가 많잖아요. 그러니까 나보다 똑똑하겠죠.” 그래서 나는 이렇게 답했다. “그래, 내가 너보다 똑똑하다고 치자. 너는 네가 낳은 아이들보다 더 똑똑할 것이고. 그럼 사람들이 점점 더 멍청해지는 거네!” 연장자가 어린 사람보다 더 낫기 때문에 연장자 말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 이것은 서열이다. 이런 서열은 우리가 사는 사회 구조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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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의 지배적 사상이 지배계급의 사상이기 때문에 그것은 어떤 창조적 행위, 즉 혁명으로만 떨쳐낼 수 있다. 혁명이 쿠데타와 같은 것이라면, 그러니까 어떤 극소수가 다른 극소수를 대체하는 것이라면, 예컨대 50명쯤 되는 군 장성들이 다른 군 장성 50명을 권좌에서 쫓아내는 것이라면, 대중이 지배계급의 사상을 머릿속에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도 혁명은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해방이 오직 노동계급 자신의 행위로만 가능한 것이라면, 대중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낡은 생각을 떨쳐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