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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계급의 혁명적 잠재력

날짜
2021/03/21
저자
린지 저먼
출처
《계급이란 무엇인가?》(책갈피,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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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계급을 논의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계급과 그 계급이 어떻게 혁명적 사상을 발전시켜서 혁명을 일으킬 수 있게 되는지를 연결하는 문제일 것이다. 현재 있는 그대로의 노동계급과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변화해야 하는 노동계급 사이의 간극이 매우 커서, 그 둘을 서로 연결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일 지경이다. 노동자는 원자화되고 분열돼 있다. 개별 노동자는 많은 시간을 더 넓은 사회로부터 떨어져 가족과 살아간다. 노동자는 인종・성・국적에 따라 나뉘고, 화이트칼라와 육체 노동자로 나뉜다. 노동자는 사업장별로도 나뉘는데, 사업장 규모, 노동과정, 조직 면에서 천차만별이다. 정치를 봐도 영국은 노동당이 노동자의 지지를 가장 많이 받는 정당이지만, 화이트칼라와 육체 노동자의 상당수가 보수당에 투표한다. 그리고 오늘날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자신의 계급 위치와 실제 그들이 처한 위치가 일치하지 않는다.
어떻게 노동자는 이런 혼란을 극복하고 하나의 계급으로 단결할 수 있을까? 애초에 노동계급이 그렇게 크고 강력하다면, 왜 이렇게 사회주의 사회는 요원해 보일까? 노동계급이 그리도 혁명적이라면, 왜 노동계급은 혁명을 일으키지 않을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의 위치

앞에서 소득, 사고방식, [미래에 대한] 기대 등의 측면에서 계급간의 주요한 차이를 살펴봤다. 이런 불평등은 노동자가 생산수단과 맺는 관계, 즉 노동자가 착취받는다는 사실의 직접적 결과다. 이 경제적 관계는 노동자의 삶 전체에 스며들어 있다. 노동자가 마주하는 사상, 즉 교육체계・언론・사회를 지배하는 일반 ‘상식’을 통해서 접하는 사상은 기본적으로 현재 상황을 용인한다. 지배자는 지배할 권리가 있고, 오로지 점진적 변화만 가능하고,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다고 여겨진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쓴 가장 유명한 구절 하나를 보자.
어느 시대나 지배계급의 사상이 지배적 사상이다. 즉, 지배계급은 사회를 지배하는 물질적 세력인 동시에 정신적 지배 세력이다. 물질적 생산수단을 지배하는 계급은 정신적 생산수단도 지배한다.
사용자는 공장과 사무실을 소유할 뿐 아니라, 자신들의 사상이 지배적 사상이 되도록 유지하는 데도 최선을 다한다. 이런 사상이 마치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것인 양 전파되도록 전체 사회구조(교육체계・가족・국가기구・언론)가 설계된다. 그래서 우리는 일상적으로 지배자의 지배할 권리를 옹호하는 주장을 마주한다. 사장은 위험을 감수하고 더 열심히 일하기 때문에 많은 소득을 얻고 부유한 생활을 누리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는 ‘국익’이 있다,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등등.
또 자본주의 착취 때문에 노동자는 소외를 겪는다. 노동자는 사회의 부를 생산하지만, 자신의 노동 생산물로부터 분리된다. 이 생산물은 노동자가 전혀 통제할 수 없는 낯선 것처럼 보인다. 그 결과 노동자는 단지 노동과정에서뿐 아니라 삶의 모든 측면에서 무력감을 느낀다.
프롤레타리아에게는 … 그들의 생활 조건과 노동조건, 그와 더불어 현대 사회가 존속하기 위한 조건 전반이 우연적인 것, 개인으로서는 통제할 수 없는 것이자 어떤 사회적 조직을 통해서도 통제할 수 없는 것이 됐다.
게다가 노동자는 자신의 생산물을 시장에서 사고파는 상품으로 대면한다. 상품은 (노동자 착취라는) 사회적 관계의 결과물이지만, 마치 그 자체가 사회적 관계를 결정하는 사물인 것처럼 보인다. 노동자에게 상품은 마치 자신의 노동과 삶에서 동떨어진 것이고, 오직 시장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노동자가 생산한 것과 노동자 자신의 노동력을 포함해 모든 것에 가격이 붙는다.
생산수단에서 배제되고 자신의 노동 생산물과 단절된 노동자가 노동을 삶의 가장 의미 있는 부분이 아니라 삶의 희생이라 보는 것은 당연하다. 은퇴 후의 목가적 삶을 위한 투자, 주말이나 금요일 밤에 대한 기대 같은 흔한 얘기를 들어 보면, 노동이 ‘진정한 삶’을 시작하려면 거쳐야 하는 끔찍한 현실로 여겨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가 자신의 주변 세계에 대해 느끼는 소외와 통제 결여 때문에 여가도 소외의 지배를 받는다(시장과 상품화된 세계에서 탈출할 방법은 없다).
바로 이런 상황 때문에 노동자는 자신을 노동자가 아닌 다른 무엇으로 보는 것이다. 오늘날 노동자를 단순히 소비자로 보는 관점은 매우 흔하다. 큰 공장, 기업 도시, 거대한 노동계급 거주 단지, 축구 관람이나 야유회 같은 집단 여가 활동으로 형성된 집단적 정체성은 이미 사라졌다고 많은 사람이 주장한다. 이제 개인들은 자가용을 타고 따로 출근하고, 소규모 단위로 일하고, [소규모 공동체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 브룩사이드에 나올 법한 작은 주택단지에서 살고, 영화 관람도 집에서 한다. 이들은 계급 위치가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소비하고 어떤 옷을 입는지로 자신을 규정한다.
1950년대 이후 노동시장은 갈수록 정체성의 주된 원천으로서 기능하지 못했다. 노동시장의 지배적 지위는 소비 시장으로 넘어갔다. 사람들은 더는 무엇을 하는지로 정의되지 않고, 무엇을 가지고 무엇을 소유하는지에 따라 정의된다. 아마도 이것이 어떤 사람들이 노동계급인지 중간계급인지 하는 질문이 의미가 없어진 이유일 것이다. 이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선택한 일을 하며, 사회적 지위에 묶인 이전 세대의 한계에서 벗어난 개인의 집합일 뿐이다.
이 같은 설명에도 물론 중요한 부분적 진실이 담겨 있다. 대부분의 개인은 개인적 관계, 취미 등으로 자신을 규정하는 태도를 취한다. 이것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20세기 내내 노동계급의 문화적 풍속, 패션, 휴가는 모두 노동자의 삶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소비와 개성이 중시되는 것은 바로 노동자의 삶의 경험 때문이다. 일하는 시간을 전혀 통제하지 못하고, 어디서 어떻게 일할지 일에서 어떤 보람을 얻을지도 거의 통제하지 못한다면, 노동 이외의 모든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노동자가 삶의 모든 중요한 결정을 자신의 개성대로 내리지 못할 때, 명품 옷(또는 값싼 모조품)을 입고, 이웃과는 약간 다르게 집을 꾸미고, 해외로 휴가를 떠나는 것 따위가 훨씬 중요해진다. 노동자의 삶이 판에 박힌 듯 단조롭고 노동도 끔찍하다면, 가정을 꾸리고 가족을 얻는 것(특히 자신의 아이는 자신이 살아온 것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삶의 중심이 된다.
문제는 노동의 세계에서 벗어나려는 이런 ‘탈출구’가 진정한 탈출구가 못 된다는 것이다. 이런 ‘탈출구’는 약간의 위안과 행복을 가져다주(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기본적인 것만저 허락받지 못하는 이들을 보통 훨씬 불행해지)지만, 이것이 시장과 착취 체제의 대안이 되지는 못한다.
시장에 기초해 세워진 사회구조에서 개인들과 사회집단들이 맺는 관계는 협력하는 인간 사이의 교류처럼 직접적 방식으로 이뤄지지 않고, 시장을 통해 구매와 판매의 관계로 형성된다. 따라서 사회생활이 복잡하고 긴밀하게 서로 맞물리는 활동의 네트워크가 되고 그 속에서 사람들이 완전히 상호 의존할수록, 사람들은 더 원자화되고 사람들 간의 접촉은 서로를 가깝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단절시킨다.
그래서 가장 위안을 주는 듯한 삶의 측면이 사실은 반대 구실을 한다. 노동자가 자신의 개인적 재능이나 흥미를 색다른 방식으로 발산해 보려는 분야에서조차 시장이 작동해 그 분야를 집어삼키고 그 과정에서 ‘개인적’이거나 ‘색다른’ 것을 죄다 없애 버린다.
일부 사람들이 개인적 활동이나 비전문적・‘비주류적’ 혁신을 통해서 자연・스포츠・예술을 접할 방식을 찾으려 하더라도, 자본은 매우 진취적이기 때문에 이런 활동은 가능한 한 빠르게 시장으로 통합된다.
따라서 자신을 소비자로 규정하는 것은 노동자에게 결코 소외의 탈출구가 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의 소외를 시인하는 것이자, 상품생산에 기반을 둔 세계에서 “지위는 많은 것을 만드는 능력이 아니라 그것을 구입하는 능력에서 비롯한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상품을 구입할 수 있는 능력은 노동자의 삶에서 중요할 수 있다. 특히 실업자나 연금 생활자같이 사실상 상품을 구입할 능력이 없는 이들이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자가 자신을 집단의 일부로 보기 시작할수록 이런 능력의 중요성은 줄어든다. 노동자가 원자화된 자신의 삶을 극복하려고 행동할수록(다시 말해 집단적 투쟁에 참여할수록), 옷이나 자동차 따위를 중시하던 바로 그들이 집단적 행동을 더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한다.
노동자가 처한 상황을 보면, 노동자는 새로운 사회를 조직할 수 있기는커녕 하나의 계급으로서 자신이 종속된 처지를 극복하는 것도 극도로 어려워 보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영국과 프랑스에서 옛 봉건 경제를 무너뜨리고 현대 자본주의 국가를 수립한 당시의 신흥 자본가 계급(부르주아지)과 현재의 노동계급은 매우 다르다. 당시 부르주아지는 옛 봉건사회 내부에서 소수파 계급으로서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부르주아지는 도시를 근거지로 삼아 자신의 산업을 발전시키고 자신의 학교와 대학을 설립하고 심지어 자신의 종교까지 만들었다. 그래서 부르주아지는 부와 권력을 쌓아 혁명을 일으키고 지배를 확립할 수 있었다.
오늘날 노동계급은 그와 비슷한 계급 기관을 자본주의 사회 내부에 만들 수 없다. 노동계급은 어떤 자산[생산수단]도 소유하지 못하고, 사회의 부를 생산하는 능력을 제외하면 아무 권력도 없다. 오직 자신의 유일한 힘을 자각(해 생산수단을 장악하고 낡은 자본주의 국가를 파괴)할 때만, 노동계급은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다. 이는 오직 집단적으로만 가능하다. 노동계급은 집단적으로 생산하고 일하기 때문이다. 오직 혁명의 과정에서만 노동계급은 원자화와 소외를 극복하고 완전히 의식적인 계급으로 거듭날 수 있다.
이런 공산주의 의식이 대규모로 확산되고 공산주의의 목적 자체가 실현되려면, 대대적 규모로 인간 자신이 변해야 하며, 이런 대규모 변화는 오직 실천적 운동, 즉 혁명을 통해서만 일어난다. 그러므로 이 혁명은 필수적이다. 지배계급을 전복할 다른 방법이 없을 뿐 아니라 지배계급을 전복하는 계급이 오직 혁명을 통해서만 낡은 사회의 오물을 털고 새 사회를 건설하기에 적합한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위 구절은 마르크스가 노동계급을 즉자적 계급과 대자적 계급으로 구별하면서 쓴 것이다. 여기서 마르크스가 주장한 것은, 객관적으로 노동계급은 하나의 계급으로 존재하지만 계급의식을 얻기 위해서는 투쟁하는 방법과 자신만의 사상을 발전시키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오직 노동계급의 투쟁과 사상이 노동자 혁명이 가능한 수준에 올랐을 때만, 노동계급은 완전히 의식적인 계급이 될 수 있다.
물론 갈 길은 멀다. 체제의 많은 부분을 수용하다가 갑자기 체제를 완전히 반대하는 쪽으로 직행하는 노동자는 드물다. 노동자가 벌이는 매일의 투쟁이, 계급투쟁의 학교가 되고 노동자가 자신의 사상과 활동을 더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마르크스는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관련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특정 공장, 심지어 특정 업종에서 파업 등을 벌여 개별 자본가에게 노동시간 단축을 강요하려는 노력은 순전히 경제적 운동이다. 반면 8시간 노동법 제정을 강제하려는 운동은 정치적 운동이다. 이런 식으로 노동자들의 개별 경제적 운동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정치적 운동이 성장한다. 여기서 정치적 운동이란 일반화한 형태로, 즉 일반적이고 사회적 강제력을 발휘하는 형태로 계급의 이익을 강제하려는 계급 운동을 뜻한다. 이런 운동을 조직하려면 일정 수준의 조직이 필요하지만, 동시에 이 운동 자체가 그런 조직을 성장시키는 수단이기도 하다.
여기서 핵심은 노동자가 투쟁 속에서 자신의 사상을 바꾸고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핼 드레이퍼는 다음과 같이 썼다. “노동계급은 조직되지 않을 때 원자화된다. 계급 조직이 계급성을 발현시킨다. 조직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계급성이 개인적 반응보다 갈수록 우선하게 되고 계급과의 일체감이 더 커진다.”
조직은 투쟁 속에서 만들어진다. 계급투쟁은 노동자의 일상적 삶의 일부이고 노동자의 일상적 경험에서 나온다. 노동강도 강화, 복지 삭감, 대중교통 악화, 세금 증가 등(이런 방식으로 지배계급은 노동자를 희생시켜 생산된 잉여에서 더 많은 몫을 뽑아내려 한다)이 모두 계급투쟁의 쟁점이 된다. 이런 경험 때문에 많은 노동자가 적어도 어느 정도는 자신이 노동자이고 착취받는다는 점을 인지한다. 체제에 뭔가 문제가 있고, 노동조건이 너무 가혹하고, 임금은 들어오자마자 사라지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자각은 흔히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결합된다.
노동조합 조직은 이런 결합된 생각의 반영이다. 노동조합은 세상이 크게 잘못됐고 노동자가 이 잘못된 세상의 피해자임을 자각하지만 근본적 변화는 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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